2009/07/07 10:45

[기자회견문]우리는 기념이 아니라 생존을 원한다!

[기자회견문]

우리는 기념이 아니라 생존을 원한다!

제 14회 여성주간을 맞아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다.

 

- 일시 및 장소 : 2009년 7월 6일(월) 14:00, 국회 정론관

- 참석: 박김영희 부대표, 윤난실 부대표, 심재옥 여성정치위원회(준) 위원

 

7월 1일에서 7일은 여성발전기본법에서 정한 여성주간입니다. 여성의 빈곤과 노동문제에 대해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했던 정부가 올해도 전시성 행사, 동원성 행사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진보신당은 경제위기하에서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대책을 정부에 강력이 요구하고자 합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경제위기 상황에서 여성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올해 2월 통계청은 여성취업자는 남성에 비해 무려 70배가 감소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실업통계에는 여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밀려난 여성노동자들은 실망실업자, 곧 절망하는 실업자로 유입되면서 구직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젊은 여성, 저학력 여성, 일용직과 자영업/무급가족종사자에게 타격이 컸습니다. 이는 최근의 정부의 대책에서도 여성과 비임금노동자가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영세자영업이 몰락하고 영세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에서 임시 일용직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소리도 없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IMF 이후 심화된 양극화로 인해 현재 경제위기에 가장 타격을 받는 집단 중에 하나는 바로 빈곤여성, 여성가장, 임신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여성, 비정규직 여성입니다. 여성일자리의 문제는 호황기에도 불황기에도 언제나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으나 한국사회 최근 10년을 보면 IMF 이후 여성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하락했습니다. 그때는 정규직 여성노동자 우선해고로, 지금은 비정규직 여성의 대량 해고로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이 와중에 정부에서 여성일자리대책으로 확대하고 있는 사회서비스 정책은 잘못된 방향과 운영으로 인해 서비스·노동의 질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합니다. 돌봄노동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게 하고, 극도로 불안정한 일자리로 만들어 놓고 그동안 여성이 해왔다는 이유로 여성을 위한 일자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사회서비스 종사자에게 보험을 적용하고 임금을 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어떻게 돌봄사회로 전환할 것인가, 어떻게 여성이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전망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번 여성주간 기념식에서 정부는 녹색성장을 통해 여성이 경제성장에 주역이 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녹색성장은 원자력확대, 4대강 사업, 물민영화로 대표되는 녹색성장기본법입니다. 이 법이 녹색을 볼모로 개발을 추진하여 결국 파괴와 불평등을 낳는 녹색파괴법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녹색파괴 정책에 여성보고 주역으로 나서라는 것은 여성적대적인 정부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녹색파괴는 더 빈곤한 여성에게 더 많은 악영향을 주고, 모성권을 치명적으로 침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7월 3일에 변도윤 여성부장관은 “현실적으로 경기불황 속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비정규직 유예를 위해 정치권이 결단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나아가 그에 대한 이유로 “비정규직 여성근로자의 76.2%가 기혼이고 상당수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며 “이들의 실직은 곧 가정의 생계 위기로 이어져 가정의 해체를 가속화함으로써 회복하기 어려운 사회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여성가장의 생계를 걱정하는 장관이 비정규직 영구화를 주장할 수 있습니까. 이대로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여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여성부장관은 대다수 서민여성에게 등을 돌린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더 이상 기념하는 것으로 여성에게 생색내는 여성주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경제위기와 불평등한 노동조건, 가사와 돌봄이라는 삼중의 부담을 지고 희망 없는 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정부가 당장 나서야 합니다.

진보신당은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1. 여성을 비정규직으로 내모는 비정규직법을 폐기하라!

1. 정부는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과 파견법 폐지를 실시하고, 당장 정규직 전환에 앞장서라!

1. 청년여성과 영세사업장 종사자, 실망실업여성을 위한 실효성 있는 일자리정책 마련하라!

1. 저임금, 불안정 돌봄노동 여성에게 강요하는 사회서비스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1. 일하는 모든 여성에게 모성권을 보장하라!

1. 반녹색, 반여성 녹색성장기본법 폐기하라!

 

2009년 7월 6일

진보신당

 

*문의: 나영정 대외협력국장(02-6004-2018)

 

*첨부1 : [관련통계] (통계청)

 

1. <표 1> 전년동월대비 취업자수 증감 및 증감률

2. <표 2> 성별 연령별 취업자수 및 전년동월대비 증감률

3. <그림 1> 1998년 종사자 지위별 취업자수 전년동월대비 증감률 추이

4. <그림 2> 2008-2009년 종사자 지위별 취업자수 전년동월대비 증감률 추이

5. <그림 3> 임금근로자 종사상 지위별 남성 취업자수 전년동월대비 증감률 추이

6. <그림 4> 임금근로자 종사상 지위별 여성 취업자수 전년동월대비 증감률 추이

7. <표 3> 학력별 성별 취업자수 전년동월대비 증감 및 증감률

8. <표 4> 성별 실업자 전년동월대비 증감 및 증감률



*첨부 2: 기자회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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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7 22:19

여이연 2009 여름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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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흐쉬나 2009/07/03 15:45 address edit & del reply

    히잉 듣고 싶은 강좌 정말 많은데 ㅠㅠ 으허어엉 ㅠㅠ

  2. 타리 2009/07/07 10:46 address edit & del reply

    ㅎㅎ 나중에 만나면 시대난독 후기를 말씀드릴게요. 글을 쓰려고 했는데....

2009/06/11 12:51

[정책논평]범국민적 출산장려운동에 헛웃음만 나온다.

[정책논평]

범국민적 출산장려운동에 헛웃음만 나온다.

진정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공적 책임을 다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지난 9일, 정부와 종교.시민사회.재계가 망라된 민관합동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가 출범했다.

저출산 사회의 도래와 그에 대한 대비의 중요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출산과 양육, 돌봄의 문제가 여성에게 전가되어 있는 사회문화적인 조건과 국가적 책임의 회피, 불안정한 일자리, 감당하기 어려운 사교육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저출산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지금 시작되고 있는 이 범국민적 운동의 기조다. ‘저출산’이 국가의 위기라며 국민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동참하라고 하지만, 출산율 강화를 통해서 국가경쟁력과 경제발전을 높이자는 논리는 여성을 국가의 인구정책 수행자로 대상화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경쟁력과 경제발전 논리로 추진되어왔던 정책들이 오히려 대다수의 서민의 삶의 질과 시민적 권리들을 축소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정부의 ‘저출산’ 극복 담론을 동의하기 어렵다. 재생산을 성장과 효율, 경쟁으로 설명하는 정부가 과연 제대로 된 ‘저출산’ 정책을 내올 수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출범식에 참석해서 “사교육을 없애고 공교육만 해서도 훌륭한 대학에 가고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면 애를 낳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대통령은 책임질 수 없는 발언을 하고 계신다. 현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사교육 경감 대책도 전혀 사교육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말잔치이고, 심지어 계속해서 좋은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정부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대통령이 이어서 “옛말에 아이는 자기 먹을 것을 갖고 태어난다”고 말한 것처럼, 많이 갖고 태어날지, 적게 갖고 태어날지를 그냥 개인 운명으로 돌려버리고 각자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다.

운동본부는 앞으로 16개 시도별로 릴레이 실천결의대회를 열고, 참여단체별로 출산장려 캠페인을 벌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 눈에 띈다. 먼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종교계는 낙태방지 등 생명존중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낙태방지가 종교적 신념일지는 모르겠지만 저출산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판에는 완전히 빗나간 운동이라고 꼭 지적하고 싶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이심전심하는 것은 알지만 특정한 종교의 신념이 왜 국가적인 캠페인으로 승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

경총을 중심으로 한 재계는 40시간 노동시간을 정착시키겠다고 했다. 재계는 저출산의 핵심을 알면서 비껴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경제위기라며 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정당화하고자 하면서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40시간 노동을 정착시키겠다니 참으로 염치도 없다.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밀려났던 여성노동자들을 최우선으로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있는 재계는 저출산의 원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의 국정기조를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여당 당사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에는 “아버지 당신이 희망입니다 가족의 희망,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씌여있다. 경제위기마다 시작되는 가장 기살리기 운동은 경제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다시 그 (남성가장) 노동자의 기살리기를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연말 라디오연설에서 본인이 대한민국의 가장이며 아버지임을 자임한바 있다. 이런 대통령이기에 이번 출산장려 운동도 국가정책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명령처럼 들린다. 국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내용이 없이 훈시와 덕담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이제 정말 피곤하다. 대다수 서민들이 체감하고, 저출산에 대한 올바른 기조위에 정책을 추진할 능력이 없다면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이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 일부 종교계와 재계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낳을까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미 낳은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도 급박한 문제이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유아와 어린이들, 그리고 그들을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 저출산 대책의 시작이다. 교육과 노동정책을 서민정책으로 돌려놓지 않는다면, 대다수 서민들은 계속해서 아이 낳지 않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출산을 통제,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진정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공적 책임을 다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2009년 6월 11일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문의 : 나영정 대외협력국장 (02-60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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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09:39

OECD 1위


자살율 OECD 1위
비정규직도 OECD 1위
출산율도 OECD 뒤에서 1위
OECD 노동시간 1위
OECD 남녀수명차 1위 
OECD 세부담 증가율 1위 
OECD 국채증가율 1위 
OECD 사교육비 비중 1위 
OECD 제왕절개술 1위 
OECD 발암율 1위 
OECD 식품 물가상승율 1위 
OECD 저임금 노동자 1위 
OECD 산재사망자 1위 
OECD 결핵 1위 
OECD CO2 배출증가량 1위 
OECD 어린이 사망율 1위 
OECD 이혼율 1위 
OECD 노동유연성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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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14:54

[레디앙]다른 남자로 향해가는 세 남자의 이야기

다른 남자로 향해가는 세 남자의 이야기
대담한 커밍아웃 다큐 <3×FTM>…"왜 성은 자연이고 운명인가?"

   
  ▲ 다큐멘터리 <3×FTM> 포스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전환 남성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다. 언뜻 보면 수학공식 같기도 한 다큐의 제목 3×FTM은 세 명의 성전환 남성을 뜻한다. Female To Male 혹은 Female Toward Male의 줄임말로, 여자에서 남자로 바뀐, 혹은 여자에서 남자로 향해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가 아니라 ×를 넣은 이유는, FTM이라는 단어를 풀어낸다고 해서 다 담아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는 성전환남성의 삶을 드러내는 이야기이자 무지, 명진, 종우라는 세 주인공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함께 보는 사람들에게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런 면에서 성전환자의 삶을 다루는 다큐가 만들어지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점은 참 고무적이다. 실은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성전환남성은 어려운 커밍아웃을 결정했을 텐데, 자신의 삶의 모습이 극장에서 보여진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다. 이런 커밍아웃을 이제 우리가 마주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차례다.

드디어, 성전환남성의 커밍아웃

성전환여성에 반해 사회적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성전환남성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동성애자, 양성애자와 함께 트랜스젠더는 성소수자라는 우산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성전환남성은 소수에 속한다.

동성애자로 대표되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트랜스젠더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 내부에서 정체성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민도 시작되었다. 다큐에 나오는 명진은 남성답게 살아왔지만 어떤 한 여성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어오다가 남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찌 보면 여성동성애자에서 성전환남성으로 변화한 것이지만 명진의 인생에서 보았을 때는 절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변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종우는 ‘나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남자’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무지는 항상 남성으로 보이고자 했고 남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자신을 긍정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가지게 했지만 이러한 고민은 성소수자를 넘어서는 고민이다. 성전환자가 살아오면서 부딪히는 경험은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가는 바로 이 생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현재의 성전환 남성의 삶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은 나의 조건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3×FTM>의 한 장면

동성애자가 사회적으로 가시화되면서 비로소 ‘일반’이 ‘이성애자’라는 자기 규명이 가능했던 것처럼 성전환남성 그리고 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은 정상적인 여자와 남자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한 성별이분법 위에서 구축되어 왔는지를 낯설게 보게 한다.

‘불법’과 ‘유령’이기를 강요하는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출생신고가 되고, 여자라는 신분을 가진 상황에서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생애의 전 과정에서 직면하고 부딪히는 삶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줄이 갈리고 다른 번호가 부여되며 다른 자리배치에 들어간다.

2차 성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정상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신체의 변화를 맞이하며 신체와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인생을 예고한다. 종우는 지금도 벼락을 맞아서 ‘생리’라는 단어 자체를 뇌 속에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와 같은 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여성이 자꾸 좋아질 때 ‘나는 동성애자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진심으로 자신이 멋있는 남성이 되어, 내가 그런 멋진 남성이 아니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가슴찢어지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주민등록번호를 국가로부터 부여받았지만 뒷자리가 2로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취직하지 못하고, 은행에 가지 못하고, 관공서를 드나들지 못하는 ‘불법’적인 삶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명진은 운이 좋게 신분상의 성별을 정정하도록 판결을 받아서 남성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력서에 ‘여자고등학교’를 ‘고등학교’로 표기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고 사기죄로 고소를 당한다.

또한 차사고가 나거나 싸움이 붙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피해를 당했지만 경찰서에 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혼자 감당하거나 숨어야만 하는 유령 같은 삶을 끝내고 싶다. 신분상의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서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성전환수술은 엄청난 비용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남성의 신체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과 남성의 신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비용과 건강을 대가로 치루어야 한다는 강요는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얘기이다.

한편 조금 다른 남성으로, 남성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스킨쉽과 조금만 틈이 보여도 ‘사내자식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주고받는 남성간의 경쟁과 긴장을 견디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과연 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남자로 태어난, 남자로 보이고 싶은, 남자가 되어야 했던

종우, 무지, 명진은 ‘남자’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조금 다른 삶과 고민의 결을 보여준다. 그 결들은 성전환자라고 같을 수 없고, 비성전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결들은 남성성/여성성, 남자다움/여자다움에 대한 성별규범과 마주칠 때 다양한 파열음들을 낼 수 있다.

   
  ▲ <3×FTM>의 한 장면

당신은 성전환자가 아닌 존재로 태어나기를 선택했는가? 당신은 얼마나 남자 혹은 여자로 보이고 싶고, 그걸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당신은 사회에서 규정하고 요구하는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을 얼마나 수행하고 있는가? 당신은 진짜 남성 혹은 진짜 여성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남성 혹은 여성인 것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가? 남성성은 우월하고 여성성은 열등한가? 아니면 남성성은 나쁘고 여성성은 좋은가? 왜 국가와 제도는 주민등록번호 1번과 2번을 남성과 여성에 끼워 맞추고, 그것에서 신체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존재들의 시민적 권리를 제한하는가?

우리는 계급, 인종, 세대, 학력 등 사회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성(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왜 성은 자연이고 운명인가? 다큐를 통해서 성전환남성의 삶을 구경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다면 세 명의 용기 있고 대담한 커밍아웃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 같다.

덧불여,

3×FTM은 6월 4일 상상마당, 미로스페이스, 6월 6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한다. 참, 영화관에 가면 꼭 화장실을 들렸다 오시라. 보기 전에 한번, 보고 나서 한번 갔다오는 것을 권장한다. 가장 극명하게 남성과 여성을 분리시키는 공간인 공중화장실, 가장 내밀한 자신의 신체와 대면하는 화장실에서 다큐의 문제의식을 연장한 전시회가 동시에 진행된다.

또한 이 작품은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3부작을 만들고 있는 성적소수문화환경을위한모임 연분홍치마의 작품이다. 현재 최초의 커밍아웃 정치인 최현숙의 총선과정을 그린 <레즈비언 정치도전기>가 만들어져 영화제 등에서 상영되고 있고, 게이들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다루는 <종로의 기적>이 제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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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10:36

근로장려금 해프닝

이명박 대통령님께서 유가환급금 이후에 또 서민들에게 현금을 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하여 저소득층에게 주시는 근로장려금!

이거 받고 더 힘내서 일하라는 말씀이시다.
얼마전 클린턴이 와서 강연을 하며 "부자 감세 하지 말고 저소득층이 소비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던데
아마 앞에것은 무시하시는듯. 

근로장려세제 개요를 먼저 살펴보자.

경제 양극화로 인한 근로빈곤층.
열심히 일하지만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에 못미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어쨌든 일하는 근로빈곤층에게만 지급하겠다는 것.


아마 매년 많게는 1가구당 120만원을 지급할 것 같은데,
천문학적인 부자감세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물론 내수진작을 위한 언발에 오줌누기 밖에 안되는 것을 가지고
조세제도를 통한 소득재분배라고 하는 것은 완전 오바다.




근데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일단 부부여야 한다. 또한 18세 미만 자녀를 1인이상 갖추어야 한다.
물론 저소득층에서도 미성년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더욱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소득, 재산 기준을 하지 않고
신청 자격 자체를 부부, 미성년 자녀로 구성된 가족으로 한정되는 것은
심각한 차별마인드를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소년소녀가장은? 빈곤노인은? 이혼, 사별한 한부모 가족은? 청년빈곤층은? 성소수자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이자 아버지 기살리기 선봉꾼인 우리 대통령님의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라
당연하기도 한데, 너무 노골적이다.

그리고 가족 규범, 조세 규범 자체가 이미 근로와 소비로 완전히 합일되어 있다.

사회에서 누가 가장 근로와 소비에 적합한 가를 평가하고 그것에 따라 국민을 분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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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흐쉬나 2009/05/20 16:18 address edit & del reply

    1인 가정은 왜 안들어있을까요. -_-;; 저노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oTL

  2. 타리 2009/05/26 11:55 address edit & del reply

    글게말여요! 부렉부렉!!!! 명박이는 가족이 없어지는 건 두렵지만 개인이 없어지는건 안중에도 없겠지요.

  3. 미륵불 2009/05/29 19:55 address edit & del reply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제도로 올 해 첫 시행입니다. 군말말고 받아드세요. 다음해에는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4. 타리 2009/05/31 17:28 address edit & del reply

    아 그렇군요. 그렇다고 제도의 성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저는 자격이 안된다는 말씀인데....

2009/05/14 18:33

[참세상]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공학의 대표적인 예로..

채진원 ccw7370@hanmail.net / 2009년02월14일 11시15분

* 지난해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 "어느 노조간부의 고백"이란 글이 조금 더 정리되어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펴내는 월간지 노동사회2008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날카로운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2008년 6월, 미국산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문제제기로 개화되었던 촛불시위가, 마침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시민권력(civic power)의 발견’으로 최절정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노조 간부의 절실한 고백

시민들이 내뿜는 개성과 다양성의 향연, 그리고 카니발적 열린 공간에 매료되었던 어느 노조간부는 고뇌했다. 그는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노조원들의 다양성 부재를 현 노조운동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이 노조간부는 공공노조의 신세종 부위원장이다. 그의 통찰과 반성은 인터넷 매체 『레디앙』(7월8일~12일)에 소개된 바 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원되지 않은 촛불, 조직되지 않은 촛불, 다양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 이것이 정답이고 이것이 배후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자발성은 창조성을 끌어냈다. 5월24일 이전까지 촛불집회를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손 피켓의 문구들, 그 재치 발랄함과 창의성들. 내로라하는 명 연설가들을 뛰어넘는 재치로 대중을 압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발언들.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야만 집회가 진행될 만큼 몰려드는 자유발언자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구호, 새로운 선전물들. 사진기를 들고 피켓만 찍으러 다녀도 지칠 정도로, 집회 자체가 생기 넘쳤다.

그런데 우리 노동조합은? 잠시 우리(노동조합)의 집회와 비교해 보자. 집회의 목적에 대한 (때로는 치열하기까지 한) 토론, 조직지침 하달, 조직 동원, 틀에 박힌 집회(민중의례, 십수 년째 비슷한 사람들의 항상 똑같은 발언,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민중가요 부르기, 공연 한 토막, 결의문 낭독). 이제는 선전전조차 동반하지 않고 시민들에 대한 홍보방송조차 하지 않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행진, 그 과정에서 조합원 대부분이 빠져나간 후 진행하는 마무리 집회……. 너무 심하게 표현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동자도 국민이고, 시민이다. 아니 노동자가 국민과 시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국민과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주와 자유, 노동해방과 진보를 부르짖는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획일주의를 양산해 오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백을 통해 신세종 부위원장이 던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해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검토해 볼 것을 촉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민이 가진 ‘다양성’은 무엇인가? 둘째, 시민들이 가진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노조원들의 ‘활동’은 무엇으로 개념정의 할 수 있는가? 셋째, 노조원들도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 넷째, 노조원들이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정치공학’ 버리고 ‘정치적인 것’ 복원해야

이러한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 한나 아렌트(H. Arendt)라는 미국 정치학자의 의견을 참고해보도록 하겠다. 아렌트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praxis: action) 세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 행위를 최고의 것으로 위계 지웠다. 여기서 행위는 고대 그리스 자유시민들의 삶의 형태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를 느끼는 즉,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한편, 행위보다 아래에 있는 노동과 작업은 각각 고대 노예와 장인의 삶의 양태다. 먹기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형인 노동적 동물(animal laborans)과, 이윤을 위해 자기 삶을 소비하는 제작인(homo faber)의 삶을 상징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렌트는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먹이를 구하는 것(사냥, 식물채집 등)은 노동으로, 직접적인 신진대사를 넘어서 항구적인 물건을 만드는 것(기계생산, 도시건설, 사회제도화 등)은 작업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과 작업은 모두 타인의 삶과 목적을 위해 자신을 노예화하거나 수단화하는, ‘도구적 행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렌트는 오직 행위만을 ‘인간적인 것’으로 존대했다. 다양성(plurality)을 행위의 속성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즉, 아렌트에게 행위는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 속에서의 공동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러나는 공적영역의 사례로서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의 ‘공화국’, 그리고 1871년의 ‘파리코뮌’을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이 공적영역에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것, 즉 가정경제(oikos)의 일, 그러니까 노예와 여성 등에 이뤄지는 생식과 노동이 안정됐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과 가정경제적인 것(‘사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고대 그리스의 단순한 개념 쌍 구도는,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한 국민경제 국가체제를 맞이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사회적인 것’이 등장한 것이다.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이란 과거에는 사적인 것이었던 경제행위가 공적인 관심을 획득하면서 만들어진 영역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이란 ‘자본-임노동 관계의 전면화’로, 과거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던 (가정)경제가 근대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역사적 과정을 지칭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가정에 묶여있던 노예들과 여성들이 근대적인 임금노동자로 ‘해방’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한편, 사회적인 것의 등장으로 인해 공적영역의 구조에도 변동이 왔다. 과거에는 분명했던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진정으로 공적이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던 ‘행위’가 공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망각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최고의 가치였던 정치적 행위가 새로 등장한 경제 및 계급논리에 밀려 노동과 작업에 비해 후순위로 전복된 것이다. 말과 다양성을 기초로 드러났던 공적 영역의 가치는 축소되고, 그 대신 정치적 다양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획일화된 관점과 표준화된 척도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구조화된 ‘현대의 정치’는 노동과 작업의 정치적 버전이 되었다.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인간됨을 표현하는 것이었던 정치적 행위가, 목적달성을 위한 합목적적인 도구적 행위(기획·계몽·동원)로서 ‘정치공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공학의 대표적인 예로, 이러한 기획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가치로서 노동을 넘어서 행위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다양성과 개성을 계급과 이념으로 환원하여 획일화하는 ‘전체주의’를 주조함으로써, 인간됨을 기초로 드러나는 대화와 소통의 공적영역을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아렌트는 정치공학으로는 공적영역을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말과 행위로 인간됨을 드러냈던 고대 그리스 자유시민들의 행위 개념을 현대에 되살려, 공적영역과 정치적인 것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시민들의 다양성과 노조원들의 획일성

이렇듯 인간 삶을 바라볼 때 아렌트가 사용한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라는 개념들과 그것들 각각이 추구하는 세계를 거울삼아 비춰보면, 앞에서 언급한 네 개의 질문 중 첫째와 둘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시민의 다양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아렌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시민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성’은 인간 삶의 최고의 형태인 ‘행위’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를 느끼는, 즉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정치적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 터다.

그렇게 볼 때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행위의 핵심은 ‘시민적 대화활동’이다. 시민들은 시민적 대화활동을 통해 도시공학적·경제적인 ‘물질적인 세계’가 아닌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공적영역)를 창조하고 그 속에 있을 때 인간됨을 느낀다. 시민적 대화가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가 목적-수단에 얽매이는 도구적인 속성을 가진 작업과는 다른,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세종 부위원장이 촛불시민들의 다양성과 자발성 속에서 창조성과 생기를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노조와 노조원들의 노조활동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갖는가? 이것은 ‘작업’에 해당한다. 노조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인 이익과 권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고, 노조 지도부의 활동들은 대체로 노조원들을 계몽(교육)하거나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조의 활동은 목적-수단관계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업에 해당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는 목적달성을 위해 노조원들은 집단적(집합적)이고 조직적(효율적)일 필요가 있지만, 인간의 다양성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이는 노조의 집단행동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양한 개성과 자유로운 의견을 드러내면서 형성되는 네트워크와 인식공동체에 기반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적 다양성을 ‘임금노동자’라는 단일한 속성으로 환원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노조의 활동은 그 속성상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위해 지도부, 기획, 전술, 지침, 조직화, 통권 등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노조활동에서 ‘획일성’은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해방이 아니라 자유, ‘정치적 노동운동’의 지향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해, 노조원들은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아렌트의 의견을 들어보자.

아렌트는 노동운동을 이중적으로 본다. 그는 노동운동을 경제적 노동운동인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구분했다. 아렌트는 경제적 노동조합운동을 작업의 영역으로, 즉 정치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 않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에서 발생한 1848년 혁명이나 1956년의 헝가리 혁명과 같이 사회경제적인 해법 요구를 넘어 ‘새로운 정부형태’의 형성을 요구하며 시민적 자유를 드러낸 사례들은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즉 행위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아렌트는 1871년 파리코뮌과 자코뱅당이 주도한 1789년 프랑스혁명을 특히 강조하여 대조적으로 평가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혁명의 목적은 자유이고 반란의 목적은 해방”인데, 파리코뮌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자유에 있고 프랑스혁명의 경우엔 해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해방(liberation)은 노동과 작업의 영역에서 빚어지는 빈곤과 전제정치 등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고, 자유(freedom)는 공적 공간에서의 공적행위, 즉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행위와 공동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렌트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폭력과 공포를 동원한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프랑스혁명을 ‘해방’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노동운동과 대칭되는 ‘경제사회적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스스로 어떤 언어를 사용했건 간에, “노동조합은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사회개혁을 바랐다는 점에서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노동계급의 정당’은 단지 이해관계 정당이었으며, 다른 사회계급을 대표하는 이익정당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노동운동의 경제사회적 동기를 부정하거나 정당의 역할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노동조합과 정당이 “노동계급의 근대사회로의 통합, 특히 경제적 보장, 사회적 위신 그리고 정치적 힘의 엄청난 성장”에 일정 부분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들이 ‘행위’가 드러나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설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아렌트는 노동운동 초기 단계에서 노동자들의 열정을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열정이 깃든 노동운동은 스스로를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투쟁을 통해 획득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숙한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즉 “인간으로서 말하고 행위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여기며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설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다른 이익집단들처럼 경제적 기득권과 사회적 특권에 집착하며 정치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즉,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1956년 헝가리 평의회 등의 경험에서처럼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정치공동체의 창설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이제는 더 많은 임금과 여가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적인 이익운동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아렌트의 인식 속에서 “노조원들도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셋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기 노동운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형태 형성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속에서,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시민적 대화능력, 어떻게 키울까

그렇다면 노조원들이 시민적 다양성을 보다 잘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핵심은 노조원들의 ‘시민적 대화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공동세계’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노동조합활동이 보여주는 ‘작업’의 본질적인 성격, 노조원들이 어느 정도 집단주의적 획일성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노조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데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상황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만이 노조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개성들이 아래로부터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위계적인 대의구조를 수평화하고 쌍방향소통구조로 변화시켜 ‘토의민주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 토의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선호(이익)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안이 대화와 공적 토의 속에서 가장 ‘합당한 이유’에 의해 지지되는가에 따라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토의민주주의는 충분한 대화와 토론 및 합의형성을 중요시하며, 이러한 토의민주주의가 작동될 때 노조 내 시민적 대화활동이 살아나고, 특정 정파에 포획된 특수이익들이 다수의 보편적 이익 또는 공동선을 향한 의사결정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조원들은 노조 외에 다른 ‘소통 공간’에 참여해야 한다. 시민적 다양성이 노동조합의 틀 내에서는 하나의 집단적 노동자성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대화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노조원들이 시민단체와 연대하거나 그런 단체의 회원이 되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즉,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부르주아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대화능력을 풍부하게 가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시민적 대화활동에 의해 열리는 공동세계 또는 새로운 정부형태를 구체화 할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모습은 이미 2008년 촛불시위가 보여줬다. 그 핵심은 노조원들이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노동자집단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소통과 인식의 공동체’ 또는 ‘자유인들의 네트워크’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2008년 촛불시위의 시민들은, 1871년 파리코뮌의 시민들이 체험한 것처럼 자신들의 다양한 가치를 드러내는 가운데서 새로운 정부형태인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집단적으로 제안했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공화국을 ‘민주’의 측면에서 권력의 출처로만으로 해석하지 말고, ‘공화’의 측면에서도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시민적 공론정치가 있어야만”

일반적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시민적 대화능력을 구비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공복리의 실현에 공헌하는 활동의 지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민적 대화활동’이다. 즉, 공화주의에 기반한 공화국은 ‘도시공학적 삶과 경제적 부르주아적 삶을 초월하여 시민적 대화활동으로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또한 시민들의 대화가 있을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 자유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화활동은 ‘적극적 자유’와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촛불시민들이 외쳤던 것처럼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화국의 존립 기반인 시민적 대화능력을 가진 국민의 정치참여가 요구된다. 즉, 공화국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에 시달려 있다면 시민적 대화활동은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즉, 공화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불평등 체제 도입을 위한 도구적 정치공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영역에 침투해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익정치를 공공성의 시각에서 심의할 수 있는 ‘시민적 공론정치’가 부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노조는 공장안팎에서 ‘토의민주주의’와 ‘정치적 공론장’을 꽃 피우는 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제도정치권에 대한 감시·견제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그 방식에서도 ‘정치적인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정치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정치공학’과 ‘엘리트적 활동방식’ 및 ‘이익정치’를 ‘소통적인 공론정치’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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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7 11:49

연예산업여성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대응방식


연예산업여성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대응방식

진보신당 대외협력실 국장 나영정

죽음에 대한 공모

연예산업여성노동자라는 명명은 고 장자연씨의 문제를 특수한 문제에서 보편적인 문제로 가져오기 위함이다. 또한 이번 사건이 연예계, 성상납, 자살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인이 회자되면서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문제의 본질이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알고 있고, 일정부분 눈감고 있고, 일정부분 함께 동참하고 있다. 성을 매개로 한 교환관계는 연예계를 넘어 이 세계의 문제이고, 연예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연예인이 ‘공인’이라는 조금은 이상하게 사용되는 논리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데 있어서 죄책감마저 삭감시킨다. 연예계에서 성을 매개로 한 교환관계는 성공을 위한 개인의 자발적 선택과 일부 부도덕한 권력자들의 이용의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세계 밖으로 던져졌다. 그 교환관계는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공유로 비추어지면서 다 알지만 너무나 공고히 굳어진 일이라서, 당사자들이 원하고 있어서 근절되기 어렵다고 여긴다. 또한 연예인은 생활인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서 생존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존엄이 지켜져야 할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지는 난감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은 그동안 많은 죽음으로도 깨지지 않아왔다. 비로소 한 여성의 죽음에 핵심적인 언론사, 방송사, 기획사 등의 권력들이 연루되어 있다, 이 죽음에 기획사간의 갈등이 연루되어 있다는 제기를 통해서 드디어 ‘사회적인’인 문제가 되었다. 많은 경우의 여성들의 죽음은 어떤 남성중심적 권력에 대한 도전이나 파괴, 폭로 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될 때 비로소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이는 진보진영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폭력, 학대의 여성피해자들은 공식적인 통계에도 잘 드러나지 않을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를 구분하는 태도, 자본과 권력이 명확하게 인식되었을때만 분노하는 태도,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러한 태도를 바꾸는 태도가 그간의 수많은 죽음에 대해 우리가 공모했던 지점들이다. 이러한 일상화된 희생에 대해 전면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이번 죽음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그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조선일보에게 다 넘길 수 없다.


전선의 재설정

전선을 흐리자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설정하자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고 그동안의 사적인 문제/사회적인 이슈의 이분법을 깨트리며 이 사건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착취의 문제에 대해서 끈질긴 대응이 필요하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성매매방지법을 비웃으면서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번 성착취가 일어났던 삼성동 기획사 사무실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여성의 아우슈비츠’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개별적인 수사와 단속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성별, 계급을 비롯해 사회의 모든 지위에서 실질적인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착취의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당장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해방을 전면적으로, 지속적으로 걸고 투쟁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의제를 넘어서 모든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진영의 자기의제화와 연대가 답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연예산업노동자의 현실에 주목하고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것,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예계약을 근절하는 것 등이 발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예인 내부에도 자원과 외모, 배경에 따라 많은 차이와 위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연예인도 결국은 더 거대한 기획사나 연예계 외부의 거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친족의 배경이 없어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어려운 연예노동자들은 준비생, 연습생 시절부터 불안정한/불평등한 계약을 넘어 노예계약에 가까운 상태로 길게는 십 수년을 보내기도 한다. 그간 자살했던 여성연예인들의 대부분이 가족으로부터 큰 지원이나 보호를 받기 어렵거나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그 점을 방증한다.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건설과 제대로 된 운영이 필요하다. 또한 내부고발자와 의식 있는 움직임들도 절실하다. 연예인이 상대적으로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을 보았을 때 소수의 의식 있는 행동들도 참으로 절실하다.

또한 경찰과 검찰의 권력형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수사관행이 보여주는 법의 불평등은 한국사회의 실질적인 위계관계를 보여준다. 법은 권력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희생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한 목숨의 무게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경찰은 수사의 대부분을 문건 유출경위와 진위여부, 소속사와의 갈등관계를 밝히느라 허비했다. 한 사람의 죽음보다 누군가의 명예를 위해 전전긍긍하며 덮어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절실한 것은 특검의 도입이다. 용산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거대 권력과 관련된 범죄에 대해서 제대로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자본과 권력은 언론을 길들이고 통제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권력형 언론사들도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모든 문제들에 연관되어있다. 성착취가 포함된 접대관행에 깊이 연루되어 있고 연예계의 문제를 사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에도 많은 책임을 지고 있으며 정권에 기생하면서 나팔수로 전락하며 언론사로서의 자기 근거마저 부정하고 있다. 최근의 방송장악 시도를 비롯해서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고 나서 이 언론권력은 최고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적대의 최전선에는 바로 조선일보가 있다.

5월 7일 [긴급토론회]‘장자연 리스트’의 진실과 조선일보 (2시, 국가인권위)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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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00:21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성찰은 다음과 같이 그것의 대상에 의해, 이 대상의 개념적 논리가 부과하던 것에 의해 강제되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다자의 정념들을 기발하게 규제함으로써 공동체를 평정하는 정치술에 대한 사유이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정치적 결집 방식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이다. 16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사실 정치의 특정한 주체의 본성과 행위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그것들을 언제나 권력 주체의 문제로 가져가는 일반적 주체 이론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아니다. 19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들에 대해 작업한다는 것은 '정황'이 어떻게 의견을 경영하는 자들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일들-정부경영자와 관련된 일들-의 일상을 해체했는지에 대해 작업하는 것이자, '정치'자체가 무엇을 뜻할 수 있느냐의 물음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20


서구의 정부들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민주주의를 의회주의 체제=자유시장=개인의 자유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와 블록 대 블록의 형태로 대립시켰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강제에 종속시키고, 공적인 자유를 일당 독재에 종속시키는 체제로 파악되었다. 다른 한편, 소비에트 국가들, 또한 이 블록에 대한 충성과 가장 거리가 먼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운동들도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수주의의 고전적 구분을 다시 채택했다. 이들이 보기에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적 가면인 동ㅅ에 지배 계급에 복무하는 실천적 도구 노릇을 하는 법적국가적 형태들의 체계였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부의 부배와 구체적 삶 속에 진정으로 들어간 평등과 연대에만 있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다시 사유하기 우해서는 그것의 형태와 그것의 현실의 관계를 다시 사유해야 했다. 23

나는 정체성과 주체화 사이의 틈, 즉 정체성, 정해진 자리와 기능의 공동체로 정의된 '치안'공동체와 이 자리와 정체성들의 분배를 해체하는 주체화 과정으로 정의된 정치공동체 사이의 틈을 개념화하려고 했다. 29

이 책이 다시 정식화하여 보여주려고 애썼던 정치는 항상 치안 질서를 불안정한 방식으로 자리옮기는 것이다. 치안 질서는 출생, 부, '능력'이 통치하기 위해 가리크는 방향에 따라 각자에게 각자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치는 틈에 존재한다. 그 틈은 모두의 평등한 능력을 긍정하며, 지배를 위한 어떤 토대도 존재하지 않음을 긍정한다. 34


정치적인 것이란 이질적인 과정, 즉 통치과정(치안)과 평등과정(정치)의 마주침이다.

정치는 몫없는 자들의 몫이라는 '보충' 혹은 '공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치안은 몫없는 자들의 몫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치안은 정치를 부정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치안은 정치를 부정하기 보다 (방)해한다. 랑시에르는 사람들이 정ㅊ와 치안을 단순 대립 구도로 이해한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은 치안을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치안은 행하고, 존재하고, 말하는 방식들을 서로 다르게 나누는 체제들일 뿐이다. 항상 치안 논리는 존재하며, 그로부터 (방)해받는 정치, 사회체의 상징적 몫분배에서 셈해지지 않는 몫없는 자들, 부분들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40

노동자 빈민 불법체류자 등은 정치의 주체로 불릴 수 없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정치적 주체'인 것은 아니다. 정치적 주체는 자신이 입는 피해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자신의 요구를 제도 속에 강제하는 정치 내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 권력으로 간주된 치안 질서로부터 피해를 입은 보편적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주체와 무관한다. 정치적 주체는 오히려 치안 질서의 셈법과는 다른 셈법을 통해 그 질서에 해를 끼치고 불일치를 도입하는 주체를 말한다. 50

 

자끄 랑시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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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5 22:53

모순적이고 야만적인 시대


모순적이고 야만적인 시대

타리(진보신당 성정치기획단)

 

 오바마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늦은 점심, 애인과 식당에서 순대국을 먹으며 당선수락연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역시 알흠다운 자태와 언변으로(MB..... 휴.....) 내용마저 알흠다운 연설을 하시었다. 대통령 수락연설이야 말로, 이날 단 하루라도 대통령이 국민 중 누구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정도는 심어줘야 하는거 아니겠는가!(MB..... 휴.....)

 

 오바마는 낙태와 동성결합을 찬성했다. 이건 미국의 민주당원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다. 이 두 가지는 미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아주 상징적인 이슈이고 이것에 대한 의견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어디에서나 성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이었다. 정말, 선거판에서 매번 뜨거운 감자였다.

 

 성별분리와 가족주의는 인구의 50%에게 이유 없이 싼 임금을 줄 수 있게 했고 재생산 비용을 아내의 무급노동으로 간편하게 대체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꽃피우는데 핵심적으로 필요한 장치였다. 성소수자들의 완전한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재생산이라는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인권을 보장해주는 만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점, 너의 성적 타락은 너를 부끄러운 존재로 다루어도 된다는 동의를 포함하는 것으로 알아듣겠다는 지배자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건 ‘사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대한 중요한 입장의 차이이다. 성소수자를 그런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은 예를 들어 80년대 에이즈의 위기가 불어 닥쳤을 때 에이즈를 게이들의 책임으로 밀어 넣고, 순결과 정상가족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며 이성애자뿐만 아니라 아직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동성애자들까지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점점 사회적인 것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것만 남았다. 그리고 불평등에 대해, 복지축소에 대해, 전쟁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닥치게 만들었다.

 

 정치화된 보수주의적 기독교계는 신자유주의의 선봉에서 보수적 가족주의와 개인의 무한책임이라는 매우매우 모순적인 주장을 성공적으로 합체시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양 목숨을 건다. 그야말로 안으로는 순결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정신을 무장하고, 밖으로는 모든 불평등과 폭력, 전쟁, 빈곤을 개인의 운명과 책임으로 돌리면서 십자군처럼 행진한다. 우리는 작년 차별금지법 투쟁을 통해서 바로 이 땅에서 인간을 서열화하며 차별이 정당화 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일떠선 십자군들을 확인한바 있다. 그들은 신정분리국가라는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국가전복세력이로세.

 

 어쨌든 미국에서는 민주당 흑인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해방 역사를 조명하고 미국이 이제 진정으로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완성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미국 흑인들이 오바마는 지지하지만 그가 동성결합을 찬성하는 것은 싫다고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건 여성보다는 우선적으로 흑인이 선택되는 미국의 지형을 떠올리게 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동시에, 동성결합을 헌법에서 금지하도록 하는 법안에 대한 선거가 이루어졌고 52:48로 가결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2004년부터 동성결합이 시정부차원에서 인정되어왔는데, 이로써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3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주최로 “캘리포니아 동성 결혼 법적 투쟁”을 소개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미국에서 강연을 위해 날아온 알마 송이 백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에서 동성 결혼을 위한 운동을 소개하고, 11월에 있을 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한 캠페인을 소개했다. 그 캠페인은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있는 40~50대 기독교인 여성 부동층을 겨냥한 것으로 “결혼은 기본권이고, 모두의 기본권을 인정하는 것은 미국의 헌법 정신이다”는 내용으로 그 부동층을 설득한다고 했다.

 

 그땐 참 양가적인 기분이 들었다. 결혼이 기본권이라는 감각, 그 감각을 통해서 인정을 호소하는 방식은 정말 미국식이라고 느껴졌고 몸이 조금 근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정말 결혼과 가족이라는 ‘권리’를 쟁취해내어서 온전히 미국의 품안에 안기는 방식이었다. 민주당과 오바마에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투표는 실패했다. 실패의 결과는 동성애자가 미국의 시민임과 시민으로서 누려야할 기본권을 부정당한 것이었다. 오바마가 선거기간에 동성결혼 금지법을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바마는 선택되고 동성결혼은 버려졌다. 빈민가에 길게 늘어선 유색인종 선거인단의 행렬,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선거율, 그리고 오바마를 승리로 이끌었다던 풀뿌리 민주주의 소식을 통해서 뭔가 의미를 찾아보려던 눈길이 닿은 곳은 모순이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발견한 미국사회의 인권을 둘러싼 이런 모순은 한국 진보진영 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야만적인 MB정권 아래에서, 성정치는 어떤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을까. 진보정치와 여성주의 정치는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근질거리는 가려움증을 느끼지 않는, 인정투쟁을 넘어선 무엇을 생산해내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입동에도 모기가 출몰하게 된 야만적인 시대에 말이다.




http://www.womenlink.or.kr/nxprg/board.php?ao=view&bbs_id=main_column&page=&doc_num=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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